저자 황두형 『전환시대의 무논리』 성역화된 ‘백범일지’, 낯뜨거운 영웅담·역사왜곡 실체 파헤쳐

黃인터뷰, “종북 좌파의 원조격 스승이자...거짓투성이 기회주의자에 불과”

이승만, 당대 세계 최고의 석학, 국제정세에 밝아 ‘미소공동위원회’서 드러난 소련 야욕 미리 꿰뚫어

김구, ‘김일성 각본’에 넘어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끝내 방해, 오늘의 북한 존립 당위성 제공

[엔지오프레스 = 황두형 前연합뉴스편집부국장]  


(좌)백범 김구, (우)우남 이승만 건국 대통령. 사진 블로그 캡처
(좌)백범 김구, (우)우남 이승만 건국 대통령. 사진 블로그 캡처

종북 좌파가 김구를 추앙하는 이유는 김구가 원조 주사파이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난 후 김일성 수하로 전락해서 미국이 지원하는 이승만 정부 인정을 하지 않고 소련 공산당이 지원하는 김일성의 군대에 의한 남한의 적화통일을 기다린다. 월간조선 2009년 9월호 기사 「이화장에 있는 ‘金九-류위완 대화 비망록’ 全文 공개, 金九, ‘공산군 곧 남침, 공화국 세울 것’이라면서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유엔한국위원회의 중국 대표인 류위완(劉馭萬) 公使(공사)는 1948년 7월 11일 오전 11시 김구를 자택으로 방문,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유 공사는 대화의 내용을 英文(영문)으로 요약하여 국회의장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이 문서는 梨花莊(이화장)에 보존되어 있다… 김구: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북한군)을 南進(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김구-류 공사의 대화를 읽으면 김구가 보인 행동의 모순점이 드러난다. 김구는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북한군)을 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즉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의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평양에서 발표한 4.30 성명서 중 ‘외군이 철수해도 내전은 없다.’는 대목은 완전한 속임수가 된다. 김구는 북한군이 반드시 남침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유일한 수단은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이었다. 김구는 이 안전판의 제거를 요구한 것이 된다. 즉 북한군의 남침에 대한 장애물을 치우는 일을 도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포츠담 선언에 따라 북위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은 조선 노동당을 창설하고 1946년 2월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켜 사실상의 공산 정권을 수립했으며 1948년 9월 9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미국의 군정하에서 남한의 정치가 극심한 좌우 대립으로 혼란한 와중에 북한은 소련군의 진주 이후 신속하게 인민위원회를 통해 사실상의 정부의 역할을 했음에도 1948년 8월 15일 남한의 이승만 정부 수립보다 북한의 김일성 공산 정권의 공식 선포가 늦은 이유는 남북 분단의 책임을 남한에 떠넘기려는 북한의 술책 때문이다. 김일성은 김구 등 남한의 좌파 및 정세 판단에 서툴고 국가와 민족의 장래보다는 사리사욕이 앞선 정치인을 이용하여 겉으로는 통일 정부 구성을 원한다는 선전 선동으로 남한의 정치 불안을 부추긴다. 1948년 김구와 함께 남북지도자연석회의에 참가했던 김구의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조소앙은 평양에서 북조선 노동당의 김일성 일당 독재체제를 경험하고 서울로 돌아와서 김구와의 견해 차이로 한독당을 탈당하고 사회당을 창당하며 김구를 비판한다. 조소앙의 사회당은 창당 후 국회의원 73명이 입당, 국회의원 정원이 200명인 제헌 국회의 다수당이 된다. “자신이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당의 정책이 집행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주권과 영토가 완성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을 거부할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남시욱 <한국 진보 세력 연구>)

 

김구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 노선이 다른 독립운동가를 여러 명 암살했다는 의혹과 함께 해방 후에도 많은 남한의 우익 지도자 암살에 관련된 정황이 있으며 이승만 암살 시도에 대한 의혹도 있다. 무고한 일본인 상인을 죽이고 재물을 탈취한 강도 살인범인 김구는 일본 상인을 일본 군인이라고 거짓말을 백범일지에 적는다. 백범일지는 거짓말과 어설픈 변명의 연속이다. 사람 죽이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살인마이며 민주화를 밥벌이와 출세의 도구로 삼는 종북 좌파 세력과 같이 당시 시대의 명분인 독립운동을 밥벌이와 개인의 출세욕을 위한 도구로 삼는다.

 

“중경 주재 미국 대사관 보고 문건 「임정 주석 김구의 동향에 대한 정보」에 의하면 김구가 주석으로 있는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 독립을 위해 매진하는 모든 한국 정파를 대표하지 못한다. 김구가 투표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승 권리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정책입안자이자 절대 권력자이다. 김구의 지위는 현재에는 다소 불확실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자신의 행정부에서 오직 한 번의 투표에서만 다수표를 획득했으며 그의 지지자들 사이의 불화 소문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중경의 많은 한국인이 임시정부를 지지하거나 협조하지 않는 이유는 임시정부가 국민 대신 네 개의 당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 당파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중경의 소규모 무정부주의 그룹이다. 정보에 따르면 대한민국임시정부 구성원들은 가치 있는 움직임을 위한 조직을 효율적으로 총괄할 능력이 없으며 단순히 일본이 최종적으로 패망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야망을 추진하고 개인적 재산을 불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중국 당국의 비용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어진다.” (김상구 『김구 청문회』)

 

“백범일지에 묘사된 그의 모습은 대부분 사실과 다릅니다. 그는 동학 접주를 지낸 적이 없으며 일본 육군 중위로 알려진 쓰치다는 평범한 상인이었습니다. 임정의 경무국장 시절 요즈음 화폐가치로 환산해 20만 원 정도 되는 돈을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받았다는 죄로 17살 소년을 죽였을 뿐 아니라 김립, 황학선을 비롯한 수많은 한인 독립지사들을 공금 횡령, 일제의 밀정, 빨갱이 등으로 모함하여 죽이기도 했습니다. 돈 문제의 갈등으로 인해 안공근의 살해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 그리고 백의사 대한민청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 단체들이 남과 북에서 행한 살인, 테러 행위에도 김구는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겨우 몇백 명 그것도 전혀 무장되지 않은 광복군을 수만 명 광복군이 태평양 각지의 전투에서 연합군과 치열하게 전투하였다고 광복군의 전과를 부풀리기도 한 것이 임정의 실체였습니다... 김구의 업적은 임정의 마지막 주석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기획하고 주도했다는 것 정도다.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김구의 역할이 생각보다 미미하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윤봉길의 홍구 의거에 있어서 이유필의 공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구보다 더 오랜 기간 윤봉길을 접촉했고 어쩌면 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이유필의 활약을 백범일지와 도왜실기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작위적인 혹은 음모의 냄새가 난다.” (김상구 『김구 청문회』)

 

안천 『김구 재평가와 안중근』에 나오는 전태준의 증언이다. “안공근은 임시정부에서 최고로 인기가 있던 인물입니다. 다만 왜놈들 때문에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라 제2선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지요. 이봉창이나 윤봉길 의사가 선서식을 한 장소가 어딥니까? 바로 안공근의 집 앞 현관이 아닙니까?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일도 철저히 함께 한 일인데 백범일지에 안공근이 했다는 얘기가 한 마디나 나옵니까? 김구는 안정근과 안공근이 뒷받침해서 존재했습니다. 장개석 총통도 안공근과 안정근이라야 만나주면서 위대한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기에 서슴없이 얘기를 들어주었습니다. 안공근이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고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었기에 외교를 전담하면서 쌀이나 자금의 구입을 도맡았습니다. 안공근은 매우 뛰어난 지식인으로서 무식한 김구를 가르치면서 김구를 앞에 내세우며 독립운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구는 박창일에게 시켜서 안공근을 살해한 것입니다. 살해범은 물론 김구이고 하수인은 박창일과 김돌수, 이형수의 3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병인 김돌수와 이형수가 일본군에서 탈주해오자 김구는 박창일을 시켜 함께 범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김구는 두 학병에게 담력 시험을 해본다며 공산 빨갱이 안공근을 암살하라고 시켰고 김구의 심복 박창일과 학병 2명이 일을 저질렀지요. 완전 범죄를 꾀한다고 돌을 매달아 물속에 넣었는데 떠올라 오고 만 것이다. 안태훈 진사가 패전하여 목숨도 위태로운 상태의 김구를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고 교육도 시켜주고 심지어 부모님까지 모셔다 보살펴 준 은혜를 그 아들을 살해해 배신한 극악한 인간관계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치하포 사건과 같은 무모한 항일을 하는 것은 흡사 미성숙 어린이의 행태와도 같지는 않을까 한다. 품격과 경륜은커녕 도무지 생각이 없는 본능적 폭행이다. 김구의 젊은 시절 최대 자랑거리인 치하포 사건은 아무리 적이라지만 의로움은 추호도 발견할 수가 없다... 김구의 표현대로 상당 기간에 걸쳐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고 이름뿐인 경우도 많았다. 그 상황에서 상해 젊은 층을 모아 내각을 만들고 김구가 국무령이 된 것이다. 끊임없이 파벌싸움만 하며 세월을 보낸 임시정부였고 모두 다 떠났으니까 김구가 주석이 되었겠지만 김구가 파벌싸움에 능수능란했다는 측면도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안천 『김구 재평가와 안중근』)


저자 황두형, 신간 '전환시대의 무논리'/ 출판사 바른북스 ▷저자는 연합뉴스 재직 시절, 당시 미국 오바마 현직 대통령과의 역사적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언론계로서는 국내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최근에는 언론인으로서 쌓아 올린 화려한 이력과 타이틀을 내려놓고 작가로 변신했다. 좌익 진영의 역사왜곡과 그릇된 역사관 인용을 바로잡고, 해방 정국서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택한 ‘반공사상·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체제 의의와 가치 ‘균형을 토대로한 진실한 역사’를 저자의 시각에서 직접 기록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저자 황두형, 신간 '전환시대의 무논리'/ 출판사 바른북스 ▷저자는 연합뉴스 재직 시절, 당시 미국 오바마 현직 대통령과의 역사적 인터뷰를 성공적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언론계로서는 국내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최근에는 언론인으로서 쌓아 올린 화려한 이력과 타이틀을 내려놓고 작가로 변신했다. 좌익 진영의 역사왜곡과 그릇된 역사관 인용을 바로잡고, 해방 정국서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택한 ‘반공사상·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체제 의의와 가치 ‘균형을 토대로한 진실한 역사’를 저자의 시각에서 직접 기록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아무리 애국심으로 가슴이 불타오를지라도

‘머리가 비어 있으면’ 적에 이용당하고 만다. 』

◇이하, 황두형 국장과의 20일자 인터뷰

-한국 근현대사에서 성역과도 같았던 김구에 대한 저자의 비평이 신선하다. 자서전 ‘백범일지’는 지나치게 미화돼 일각의 비판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아울러 초등학교 졸업 수준 치곤 백범일지 문체가 상당히 유려한데 직접 쓴 게 맞다고 보시나.

“친일 논란에 휩싸인 '춘원 이광수'가 썼다는 게 정설이다. 김구의 아들 김신은 이광수가 백범일지 국사 원본 윤문자임을 직접 고백한 바 있다. 명문장가(名文章家) 춘원의 손을 거쳤기에 전국민 교양서가 된 것이다. (▷친필본과 괴리가 커 사실상 이광수 작품으로 보는 게 중론.) 당시의 해방 정국에서 일제시대 국내에서 호의호식했던 인사들의 상해 임시정부 인사들에 대한 부채감 해소 차원이며 이런 행위를 통한 일부 보상 심리가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해방 후 각종 민족주의 단체 독립단체에 대한 일제 강점기 자산가들의 거액의 기부 행위가 유행이었다는 기록이 많은데 당시 사회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의 저서에 따르면, ‘김구는 개인 영달을 위해 공산당을 추종한 기회주의자였고, 무고한 일본 상인, 항일 독립투사들을 우발적으로 살해, 돈을 갈취한 잡범이자 한낱 사기꾼’으로 추정된다. 이는 소련의 첩보 문서와 일맥상통한다. 특히 ‘주막에서 일면식도 없는 일본인을 홧김에 때려 죽이고 그 피를 마셨다’던 백범일지 대목은 소름 끼치는 광기로 다가온다. 이제 김구의 이미지가 아닌 ‘실체’를 봐야 할 시점이 다가온 건가.

“김구를 본격적으로 성역화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다. 이광수와 같은 맥락에서다. 본인이 일본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일본군 장교 출신이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김구를 이용하는 측면이 있다. 김구의 아들 김신을 중용하고 김구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고 남산에 백범광장을 조성한다. 박통의 후원으로 김신은 38세에 공군참모총장이 되고 중화민국대사, 교통부장관, 국회의원을 역임한다. 박통의 개인적인 요인이 결합된 해방정국의 분위기, 그리고 이승만의 12년 장기집권 후 4.19를 통한 하야의 부작용으로 과도하게 평가된 것이 김구인 것이다.”

 

-육군 소위 안두희가 정치적 스승 김구를 저격했을 당시, ‘김구를 반역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살해 행동은 애국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후 경무대 지시였다고 진술을 번복했지만 끝내 배후 실체에는 입을 다물었다. 안두희는 ‘김구가 좌익에게 포섭됐다고 주장했고 동시에 우익 암살 배후였다’라고 했는데. 암살 동기에 관련이 있다고 보시나.

“안두희는 1955년 발간된 <나는 왜 김구 선생을 살해했나>라는 저서에서 김구 살해 이유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김구 살해 당시 김구와 나눈 대화에서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다. 안두희는 김구의 한국독립당 비밀 테러조직의 요원이었으며 1949년 8.15 기념식을 기해 자신에게 주요 임무가 배정될 것이라는 지시를 받고 그것이 이승만 대통령 암살 지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김구에게 항의하러 간다. 이어 안두희는 김구의 평양 방문이 후 북한의 김일성과 같이 미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이승만을 사대주의자로 매도하고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김구에게 항의하고 북한 공산당 노선에 끌려가는 이유가 뭐냐고 따진다. 그런데 김구는 “공산당이면 어때서?”라고 대답한다.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라면 공산당이든 뭐든 상관없다는 거다. 이것이 김구의 살아온 궤적이 보여주는 김구의 실체다.

그러면 북한의 노선과 같은 입장이냐는 질문에 “네 멋대로 해석하렴.”이라고 답변한다. 송진우, 장덕수 암살은 누가 한 것이냐, 제게 8.15 기념일에 내릴 주요 지령이란 무엇이냐, 대한민국 경찰은 이승만 대통령이 장악하고 군대는 김구가 장악하고 있으며 김구는 북한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은 무엇이냐, 여순 반란사건에 김구의 한독당이 관련되었다는 소문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구는 “그래 이놈아, 이것이 정부 구실은 한다는 말이냐?”라고 하며 또다시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고 흥분하여 안두희를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하고 안두희에게 벼루와 붓, 책 뭉치를 집어던졌다.

8.15 기념식을 기한 김구의 이승만 암살 기도를 도저히 바꿀 수 없다는 판단을 한 안두희는 백범을 살해함으로써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권총을 뽑아 “영감과 나라를 바꿉시다”라고 외치며 김구를 향해 네발을 발사한다. 김구 살해 후 총구를 이마에 대었다가 안두희는 이내 생각을 바꾼다. 이유는 자살하면 그대로 역적이 될 것이기 때문에 김구 살해의 이유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만약, 안두희가 단독범이 아니고 (일각에서 주장하는) 이승만이나 미국의 사주라면 자살하는 게 배후를 감추는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음모론이 설득력 없는 이유다.”

 

-김구는 유학파 이승만 대통령처럼 자유민주주의 개념을 몰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연 사회주의자들과 섞여진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 중에 상당수가 공산사회주의자가 되었고 해방 후에도 상당수가 김일성 친공주의가 됐다. 김구의 좌우합작 낭만적 민족통일사상은 결국 '남북분단'을 초래했다는 데서 그 한계가 지적되는데.

“김구는 자신의 집권과 입신양명, 출세가 사상이며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뭐든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김구의 정체성이 왔다갔다하는 이유다. 선공후사가 아닌 ‘선사후공’의 전형인 거다. 국가와 민족보다 개인의 영달이 더 중요했다. 이것이 김구를 이해하는 방법이며 김구뿐 아니라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인 대부분이 김구와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를 배척하는 주사파 좌파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역적으로 치부하고, 김구를 자신들의 '통일이념 적화통일' 정신적 뿌리이자 주군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위의 질의에 나온 ‘안두희의 <나는 왜 김구 선생을 살해했나>’에 그 답이 나와 있다. 이승만 정권을 반대해야 김구가 집권할 수 있고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게 북한 공산당이니 김구는 자연스럽게 공산당 노선과 같이 갈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주사파도 마찬가지다. 내가 쓴 <전환시대의 무논리> 책에서 김구가 주사파 원조라고 얘기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김구가 계획대로 이승만 암살 후 집권해서 김일성과 연합했다고 가정할 때 마르크스 레닌 이래의 전통적인 공산당의 통일전선전략에 의해 결국은 숙청을 당하고 대한민국은 공산화가 되는 거다. 그것이 2차 대전 이후 소련 공산주의가 유럽과 아시아에서 퍼진 역사이다. 박헌영과 수많은 남로당 출신, 그리고 북한의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와 연안파 등 중국 공산당 계열 북한 인사들이 숙청된 역사이기도 하고.”

황두형 前연합뉴스편집부국장/ 경성대학교 영문학과 졸업호주 본드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연합뉴스 기자(외교통상부, 재정경제부, 청와대 출입)연합뉴스 워싱턴 특파원, 연합뉴스 다국어뉴스 부장, 연합뉴스 영문뉴스 부장 역임
황두형 前연합뉴스편집부국장/ 경성대학교 영문학과 졸업호주 본드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연합뉴스 기자(외교통상부, 재정경제부, 청와대 출입)연합뉴스 워싱턴 특파원, 연합뉴스 다국어뉴스 부장, 연합뉴스 영문뉴스 부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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