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짜여진 선거공약 한편은 천군만마와도 같다.

                              

이명인 편집국장(박사, 한국현대사)
이명인 편집국장(박사, 한국현대사)

 

 

옥계 유진산(1905~1974)은 일제 때 와세다대학을 중퇴한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해방 후에는 반공 청년운동에 몸담았다가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 전북 금산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그는 1950년 2대 국회 선거에서도 같은 곳에서 출마했으나 임영신(전 상공장관)에게 또 패배했다.

그러나 대기만성형 정치인이었던 그는 마침내 1954년 3대 총선에서 다시 고향에서 출마하여 임영신과의 리턴매치에서 승리함으로써 3번 도전 끝에 뜻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50세에 초선의원이 된 것이다. 이후 4대・5대(이상 전북 금산)・6대(민정당 비례대표 3번)・7대(서울 영등포갑)・8대(신민당 비례대표 1번)・9대(충남 금산・대덕・연기)에 연속으로 당선됨으로써 7선의원이 됐다.

그런데 이런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 유진산에게도 피치못할 사정이 생겨서 지역구인 전북 금산을 스스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1963년 11월 26일의 6대 총선을 앞둔 시기였다.

당시 갓 출범한 박정희의 공화당은 전북 금산에 5.16 혁명주체였던 당 사무총장 길재호 (육사8기)를 출마시켰다. 공화당 정권이 굳이 금산에 별 연고도 없는 길재호를 입후보시킨 것은 바로 유진산을 겨냥한 표적공천이었다. 왜냐하면 유진산은 당시 5대 대선에서 전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후보로 내보내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된 5대 대통령 선거는 역대 대선 중 표수로는 가장 적은 표차인 15만6천26표(박정희 4백70만2천6백40표 對 윤보선 4백54만6천6백14표)의 아슬아슬한 결과를 연출했다.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2위는 지난 2022년 20대 대선의 윤석열 對 이재명, 24만7천077표)

비록 윤보선이 패배했지만 박정희로서는 하마터면 5.16으로 잡은 정권을 날릴 뻔한 실로 간담이 서늘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훗날 윤보선이 정계일선에서 물러난 후 제일야당의 당권이 잠시 유진오를 거쳐 유진산에게 넘어오게 되면서 신민당이 현실주의적 노선으로 타협했을 때에는 박정희와 유진산은 밀월관계를 보이기도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박정희에게 있어 유진산은 윤보선에게 화려한 날개를 달아준 적(敵)의 일등공신이었기에 과히 유쾌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당시 당의 싱크탱크였던 길재호(육사8기)의 금산 출마카드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길재호가 금산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평북 영변 출신의 실향민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금산군 부리면 현내리에 그의 혈연이 되는 해평 길씨 집성촌이 있기는 했으나 불과 몇 백 가구수준이었던 반면에 유진산은 진산면 옥계리에서 대대로 수백 년간 세거해온 문화 유씨 집안으로서 그곳에서 2백만 평 이상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연간 쌀1만석을 수확하는 만석꾼 지주였던 것이다. 금산에 거의 연고가 없다시피한 길재호는 그런 유진산에게 감히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아직 출범초기라서 집권여당으로서의 프리미엄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5대 대선 당시 박정희가 군(軍) 부재자 투표에서도 야당후보 윤보선에게 크게 밀렸던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당시 박정희는 군부조차도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당시 군의 정서가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 이전 혁명내각 시절에도 그가 임명했던 박병권 국방장관, 김종오 육군참모총장도 모두 박정희의 민정불참과 군 복귀를 강력히 압박하던 인물들이었다.

그 후 가까스로 대통령 선거를 이긴 박정희로서는 대선 후 불과 한 달 만에 치러지는 6대 총선을 반드시 이겨야만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윤보선에게 제갈공명 역할을 하고 있는 유진산을 반드시 낙마시켜야만 했고 그 선봉장 역할을 길재호에게 맡긴 것이다. 그런데 당시 금산의 터주대감 유진산에게 도전장을 던진 길재호가 내놓은 필살의 카드가 바로 전북 금산군의 충남편입 카드였다.

이미 박정희 정권은 군정통치 시기인 1962년 12월 12일 서울특별시, 도, 군, 구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법률 제 1172호)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산군을 원래 소속인 전북에서 충청남도로 편입시켰다. 이는 길재호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한때 김종필이 이의 배후라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김종필은 1987년 12월 대선출마 당시 전북을 방문했을 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이를 부인했다.

1018년 고려 현종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라주도(全羅州道)가 생긴 이래 금산군은 대대로 전라도였다. 그랬던 금산군이 이때서야 길재호 덕분에 비로소 충남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당시 금산군에서는 만약 예수님이 나온다면 모를까 그 외에는 누구도 감히 길재호의 인기에 맞설 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금산군의 충남편입 카드는 강력한 블랙홀이었다. 그래서 유진산도 하는 수없이 지역구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유진산은 길재호를 피해서 6대(민정당 비례대표 3번), 7대(서울 영등포갑), 8대(신민당 비례대표 1번, 이때 유진산의 무리한 비례대표 등록으로 진산파동이 일어남.) 총선에서 계속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공화당의 1971년 10.2 항명파동으로 길재호가 강제로 정계은퇴를 당한 후인 1973년 9대 총선에 가서야 다시 고향(당시 선거법 개정으로 2인을 뽑는 선거구인 충남 금산・대덕・연기에서 1등 당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 다음해인 1974년 4월 28일 결장암으로 사망했다. (향년70세)

이처럼 선거에서 잘 짜여진 공약 한편은 백만원군(百萬援軍)을 얻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6대 총선 당시 길재호는 집권당으로서의 프리미엄도 없이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신인 정치인이었지만 지역민의 가슴을 치는 공약 한 건으로 백전노장의 거물급 야당 정치인을 쫓아낸 것이다. 그야말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낸 격인데 항간에서는 당시 금산군의 충남편입은 박정희와 유진산의 뒷거래에 따른 결과라는 풍문이 돌았으나 이는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무엇보다도 길재호 당선의 일등공신이 된 공약을 유진산이 박정희에게 요청할 리가 만무한 것이다. 유진산 회고록 『해뜨는 지평선』에도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또 지난 1993년 방영된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유진산(배역 심양홍)이 중정부장 김형욱(배역 박상조)을 한밤중에 비밀요정에서 은밀히 만나 8백만원(현재 가치로 8억원 정도)을 받고 지역구 포기에 합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누군가가 퍼뜨린 근거없는 낭설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적어도 야당의 피라미급 의원이라면 모를까 거물급 정치인 유진산이 겨우 그 정도의 금전으로 자신의 정치적 생명줄이 달려있는 지역구 포기에 쉽게 합의할 리가 없는 것이다.

참고로 1971년 8대 총선 당시 김대중이 퍼뜨린 소문은 “유진산이 3억원(현재 가치로 약3백억원)을 받고 자신의 지역구(당시 서울 영등포갑)를 팔아먹었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먹혀 들어가서 유진산은 김대중이 동원한 괴청년들로부터 집이 거의 풍비박산이 될 정도의 수난을 당했다. 사기를 치려면 적어도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또한 당시 금산군의 충남편입으로 쾌재를 부른 또 한명의 정치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대중이었다. 당시만 해도 정치권에서 아직 지역주의가 뿌리내리지는 않았으나 장차 대권을 꿈꾸는 김대중으로서는 우선 호남의 맹주(盟主)로 발돋움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유진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진산의 지역구 금산이 충남으로 들어간 이상 그는 자동적으로 호남의 대표자격을 상실한 것 아닌가.

이제 김대중이 호남의 영수(領袖)로 떠오르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은 정성태(1915~2000, 전남 광주 갑, 3・4・5・6・7・8대 의원, 신민당 원내총무, 7대 국회 후반기 부의장 역임)와 이철승(1922~2016, 전북 전주, 3・4・5・8・9・10・12대 의원, 9대 국회 전반기 부의장,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역임)만이 남게 되었다. 그런데 평소 온건 보수주의자였던 정성태(민주당 구파 출신)와 이철승(민주당 신파 출신)은 진보좌파 이미지가 강했던 김대중과 인간적인 관계도 소원한 편이었다. 특히 정성태는 같은 민주당 구파출신 김영삼과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1967년 6월 8일의 7대 총선에서 공화당은 장차 3선개헌을 염두에 두고 개헌정족수(3분의 2) 확보를 위해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 결과 총175석 중 129석(지역구 102석, 비례대표27석)을 얻었고 신민당은 불과 45석(지역구 28석, 비례대표 17석)만을 얻게 되었다. (대중당 1석) 그래서 전남(19개)・전북(11개)의 30개 선거구에서도 공화당이 27석을 얻어서 거의 싹쓸이하다시피하고 신민당은 겨우 광주 갑의 정성태와 목포의 김대중 2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낙선하였고 대중당이 1석(전남 고흥, 서민호)을 얻었다. (당시 전주의 이철승은 정치규제 중이어서 출마가 불가능)

1996년 15대 총선에서 경기 군포시의 무당파 연합 후보였던 박기수씨(1924년생, 전남 영광 출신, 2대 전남도의원 역임)의 증언에 따르면 1967년 총선 후 한 달 만에 치러진 신민당 전남도당 위원장 경선에서 김대중(당시 3선의원)이 정성태(당시 5선의원)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함으로써 호남의 대표 정치인으로서 첫 일보(一步)를 내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기수씨에 따르면 이 경선당시 자신의 절친이자 원래 정성태의 참모였던 김녹영(1924~1985. 전남 광주, 3대 전남도의원, 8・9・10・12대 의원, 12대 국회 전반기 부의장 역임)이 김대중의 진영으로 넘어갔는데 그 후 1973년 9대 총선 당시 전남 광주시 선거구(2인 선출)에서 군소야당 통일당 후보였던 김녹영(1위 당선)이 제일야당 신민당 후보였던 정성태(3위 낙선)를 이기고 당선됨으로써 정치인으로서 치명상을 입게 된 정성태는 그대로 정계은퇴를 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정성태 낙마의 일등공신이 된 김녹영은 후일 전두환 정권에서 정치규제를 당한 후 1985년 12대 총선 당시 급조된 선명야당 신한민주당 공천으로 광주 서구에 입후보했는데 당시 가택연금 중인 김대중에게 자신을 지지한다는 메시지를 한 장 써달라는 부탁을 하였으나 단호하게 거절당했다고 한다. 당시 말기 위암으로 투병 중이던 김녹영(1985.7.10. 사망)은 이에 배신감을 느끼고 “도대체 왜 이러는거야. 후광(後廣, 김대중의 아호) 그 사람 나보다 먼저 죽겠구만”이라는 한맺힌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함윤식 『동교동 24시』 pp.226~227)

당시 김대중은 미국망명 도중 그해 2월 12일의 총선을 불과 4일 앞둔 8일 “지금 귀국하면 구속하겠다”는 정권의 협박을 무릅쓰고 귀국하였는데 즉시 가택연금 조치되었다. 그런데 함윤식에 따르면 어이없게도 김대중은 그런 상황에서 비서들을 통해 선명야당 신민당이 아니라 관제야당 민한당을 지원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순전히 선거후의 결과를 염두에 둔 김대중의 기회주의적 포석(布石)이었다. 그런데 선거결과는 김대중의 예상과는 달리 신민당(67석)이 민한당(35석)을 거의 더블스코어 차이로 누른 압승이었다.

최근 국민의힘은 김포시의 서울시 편입을 22대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김포시의 열렬한 환영에도 불구하고 정부 관련부처인 행안부의 뜨뜻미지근한 비협조와 민주당의 발목잡기 등으로 지지부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에 결사반대하고 있는 민주당도 과거 2009년에 백재현 의원(경기 광명 갑, 18・19・20대 의원, 현 국회 사무총장)의 주도로 광명시의 서울편입 특별법안을 발의한 적이 있다. 당시 박영선 등 인접 서울 지역구 의원들도 참여한 해당법안은 국회에서 장기간 계류로 자동 폐기되는 바람에 단지 「지방분권 및 지방행정체제개편에 관한 특별법」에 시도 경계를 뛰어넘는 기초지자체 간 통폐합 가능 조항(해당 법 22조 2항)을 삽입하는데 그쳤는데 그래도 그 전까지는 같은 광역 자치단체에 속한 기초단체들 간의 통폐합만 가능했던 것을 감안하면 법적으로 진일보한 면을 남기기는 했다.

그런데 이 법안을 추진할 당시 민주당 백재현 의원은 이웃 선거구(광명 을)의 한나라당 전재희 의원(여성최초의 행정고시 합격자로서 관선 광명시장 역임. 광명 을에서 16・17・18대 의원)의 비협조적인 자세를 크게 나무랐으며 당시 민주당 전체가 나서서 전 의원의 소극적인 자세를 비판하기까지 했다. 자기들이 할 때는 지고지순한 최선이고 남이 할 때는 발목을 잡고 있으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따지고 보면 지금 한동훈 위원장이 김포시의 서울편입을 추진하는 것도 당시 백재현 의원이 만들어준 법적 근거에 따르고 있는 것 아닌가.

어쨌거나 국민의힘은 이왕 내친 김에 원하는 기초단체들의 서울시 편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야 한다. 지난 2008년 18대 총선 당시 갓 출범한 이명박 정권의 한나라당이 수도권을 싹쓸이할 수 있었던 것도 뉴타운개발 공약 덕분이었다.

어차피 선거는 인물과 공약으로 국민에게 감동을 줘야하는데 지금 민주당은 감동은 고사하고 공천을 둘러싼 집안싸움 때문에 서로의 얼굴에 먹칠하기 바쁘고 모처럼 출범한 제3당은 명칭만 개혁신당일 뿐 늙수그레한 이미지의 이낙연(그와 한동훈 간의 나이차이는 무려 21살이나 된다.)과 비록 젊다고는 해도 키도 작고 호감이 가지 않는 외모의 이준석 그것도 그 시점에서 일부학과를 제외하고는 평준화된 미국 모 대학을 나와 지금까지 10여 년간 평범한 직장조차도 못 얻고 무직상태에 있고 성접대 의혹과 입만 살아있는 투사 이미지, 공약이랍시고 내놓은 것은 죄다 갈라치기 뿐인데 솔직히 선거도 어찌 보면 유권자인 고객에게 인물과 공약을 상품으로 파는 장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품들로 어찌 장사가 되겠는가.

게다가 지난 대선에서 이준석은 그가 내놓은 남녀 갈라치기로써 재미를 좀 봤다고 판단하는지는 몰라도 이번 총선에서는 전선을 넓혀 어르신들에게 지하철 무임승차 폐지 대신 1년 12만원 교통비 지원 등의 공약을 꺼내들었다가 본전도 못 건지고 비판을 덮어쓰고 말았다. 이준석으로서는 그 공약으로써 오히려 지하철이 안 다니는 대부분 지역 어르신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것으로 착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공약이 발표되던 날 기자는 경주의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중 옆자리의 어르신이 “누구를 거지로 아느냐.”고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이미 충남 서산 등 몇몇 기초단체는 벽지거주 어르신들에게 5백원 요금제 택시의 혜택을 주고 있고 다른 기초단체에서도 비슷한 혜택을 주는 곳이 많다. 그런데 그런 말 같지도 않은 것을 공약이랍시고 내놓는 꼴이라니 이러니 서울 가보지 않은 사람이 가본 사람을 이긴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준석은 정당의 대표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가 일주일에 30분 만이라도 어르신들과 자질구레한 대화라도 했다면 그런 한심한 공약을 내놓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번에도 반페미의 기수답게 병역을 필한 여성에 한해 경찰과 소방관 등에 지원가능토록 하자는 상투적인 주장을 내놓았으나 군과 경찰, 공무원, 교사 등은 MZ세대에게는 더 이상 인기직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공약들은 번지수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과연 그런 한물 간 공약으로 표를 유인(誘引)할 수 있겠는가. 하기는 만년백수인 정당의 대표가 경험이 없어서 헛다리 짚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과거에도 김대중도 공약으로 헛다리를 짚은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1971년의 7대 대선을 앞두고 1970년 7월 7일 박정희 정부의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했을 당시 야당이 김대중 주도하에 일사분란한 반대의 자세를 보인 것이다. 당시 야당의 반대는 고속도로의 성공적 개통이 눈앞에 다가온 1971년 7대 대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철저히 당리당략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대선을 준비하고 있던 김대중은 사활을 걸고 반대했는데 지금도 인터넷에는 그가 공사현장에서 드러누웠다고 주장하는 사진(사진상으로는 인물미상)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김대중은 2009년 사망할 때까지 이 사진의 진위여부에 대해 한 번도 가타부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또 당시 대선에서 김대중은 섣불리 예비군 폐지 공약을 꺼내들었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고 말았다. 당시 김대중은 1970년 10월 16일 대통령후보가 된지 20일 만에 기자회견을 하면서 선거공약을 발표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향토예비군 폐지였다. 그런데 이는 순전히 포퓰리즘적 공약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불과 2년 전인 1968년 1.21사태 당시 무장공비들이 나타나 서울시내 주택가에서 총격전을 벌이기까지 했던 살벌한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사회적 정서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이 공약이 발표되자 온 나라가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공화당은 즉각 반박성명을 통해 김대중의 사전선거운동을 지적하면서 예비군 폐지공약은 순전히 인기위주의 즉흥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고 11월 2일의 당무회의에서는 안보문제의 정치쟁점화를 즉시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11월 4일 정래혁 국방장관도 기자회견을 통해 “이는 북괴 김일성 도당에게 남침을 촉진, 유도하는 행위로서 예비군 폐지론을 즉각 철회할 것을 엄숙히 경고한다”면서 신민당의 주장대로 예비군을 폐지한다면 20개의 정규사단이 더 필요하며 이 병력을 유지하려면 연간 3~4백억원의 예산이 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여론이 불리해지자 김대중은 그 대안으로 11월 19일 ‘향토경비대 창설안’을 발표했는데 이는 당초 예비군 폐지주장에서 대거 후퇴한 것이었다. 후일 김대중은 자신의 저서(『행동하는 양심으로』 p.122)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예비군을 폐지하자는 슬로건을 시기적으로 너무 일찍 제시한 것이 잘못이었다. 선거가 임박해서 이 주장을 폈다면 상황이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하여 발표시기가 잘못되었다는 전략적인 실수만을 인정했을 뿐이었다.

지금 이낙연, 이준석 두 사람은 명색이 한 정당의 공동대표라면서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출마할 지역도 못 정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껏해야 이낙연은 광주 출마설을 흘리고 있고 이준석은 대구의 어느 한 곳을 생각하고 있다는 정도이다. 자신감이 없는 이낙연은 호남인답게 주특기인 지역 패권주의로 돌아가겠다는 것이고 이준석은 어차피 자신의 이미지로는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발붙일 곳이 없으니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판이라면 영남 한 복판에서 깽판이나 크게 한번 쳐보자는 심사인 것인가. 이러니 이당이 어찌 잘되기를 바라겠는가.

거기다가 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은 대한민국 제일의 선거판 공인중개사(구전(口錢)만 준다면 아무 고객에게나 붙을 수 있는) 김종인 옹을 염두에 두고 있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나올 판이다. 적어도 갓 출범한 정당답게 신선함을 주지는 못할 망정 대부분 국민들이 역겨움을 느끼는 인물을 공관위원장이라고 낙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신생정당이 정말로 이낙연・이준석・김종인의 3 TOP을 간판으로 내세워 선거를 뛰겠다는 것인가. 공약이 부족하다면 인물만이라도 관심을 끌어야 하는데 정말로 개혁신당이 그런 인적 구성으로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장 정신치료를 받을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 이런 판국이니 그 당에서 집단탈당 러시가 일어나는 것도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분들이야 말로 그 안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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